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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가 제24회 다산문화제를 10월 1일부터 3일(오늘)까지 조안면 다산유적지에서 진행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나선 많은 가족들과 연인들, 연세드신 분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즐겼다.
축제를 맞아 옛 우리 풍습을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참여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다산유적지에서 행사가 진행되어 유적지내에 있는 다양한 다산의 업적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다산을 조선후기 실학의 대학자로 우리는 알고 있다.
실학이 무엇인가?
탁상공론만 하는 기존 성리학의 한계에서 벗어나 실생활에 직접 활용되는 학문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둘러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전시된 수많은 저서들이 전부 한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과연 정약용은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필요한 학문을 하였는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저서들로 우리는 그를 평가하지 않는가?
의문이 들어 1층 안내데스크에 있는 두 분에게 물어봤다.
'혹시 정약용 저서중 한글로 쓰여진 책이 있습니까?' 대답은 없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물론 잘 몰라서, 확인이 안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약용의 500여권에 이르는 저서중 한글로 된 서적은 그곳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까지 살았다.
훈민정음이 1446년(세종28년) 9월에 제정.공포되었으니 정약용은 훈민정음이 발표된 후 300년을 훌쩍 넘긴 세상에 산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순수한 한문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그가 철저한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살던 시절 양반이 많았을까? 상인(놈)이 많았을까? 그것은 확인안해도 자명하다.
정말 백성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가?

서구 문물이 막 밀려들어와
중국대륙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고
일본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분열되었던 일본 열도를 통일하여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지만 여전히 양반의 깊은 잠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지...
그나마 깨어 있었다는 실학자들.. 그 중에서도 그들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정약용.
그 역시 반상의 신분구조를 깨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중 절반이라도 아니 삼분의 일이라도 한글로 쓰여졌더라면...

우리는 국사시간을 통하여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이 직지심경이라고 배웠다.
거기에 자부심은 있을지언정 그 직지심경이 우리 역사 발전에 별로 도움은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정작 세상을 발전시킨 것은 서부의 인쇄술이었다는 것이다.
직지심경의 출판기술이 일반 백성이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책을 만드는데 쓰였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부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많은 책을 펴 냈더라면...

정약용같은 실학자들이 더 많은 백성들이 읽고 배울 수 있는 한글로 책을 썼더라면...

지금도 우리는 그런 우를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말 좋은 기술이 있는데 꽁꽁 싸매고 있다든지.
시기심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막고는 있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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